트래킹 6일 째, 드디어 ABC에 오르다
[히말라야 - 데우랄리 - MBC - ABC]

밤새 비가 퍼붓듯 내렸는데, 아침이 되니 언제 그랬냐는듯 그쳤다.
어제 늦게 도착한 David 할아버지와 한방을 쓰게 되었는데, 밤새 내린 비 때문인지 난방시설이 없는 방은 몹시 추웠고,
그래서 침낭 속에 핫팩을 두 개나 붙였지만 그 한기를 이겨내기는 버거웠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노익장을 과시하듯, 트래킹 중에 늘 반바지에 민소매 차림으로 다녔고, 더구나 침낭도 아주 얇은 것을 썼는데,
자기는 하나도 춥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더웠다고 하시니 정말 체력이 대단한 분이다.

아침을 일찍 먹고, 히말라야를 출발했다. 오늘은 드디어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 오르는 날이다. 부지런히 가야한다.
대나무 숲 가득한 밤부를 지나고, 작은 폭포와  냇물 몇 개를 건너 데우랄리에 도착했다.
데우랄리에서 부터는 본격적인 히말라야 협곡으로 들어간다. 그러니 마을로 친다면 데우랄리가 마지막인 셈이다.
여태까지의 풍경이 초록의 느낌이었다면 여기서부터는 하얀 설국의 느낌이다.
특히 그 웅장함은 상상을 초월하는 스케일이다.
마치 SF 영화의 한 장면처럼 현실을 거부하는듯한 모습은 내 눈동자  속을 휘감으며 뇌를 흔들어 놓는다
그속을 드문드문 걷고 있는 트태커들은 자연 앞에 그저 나약하기만 한 작은 인간일 뿐이다
ABC에 이르는 길의 주변은 높은 산에서 쓸려 내려온 돌들이 산재하고,
만년설의 빙하가 녹아내려 강과 폭포를 만든 석회석의 물이 우레와 같은 소리를 내며 흘러내린다.


잠깐 숨을 돌리며 쉬는 사이에 건너편 산에서 눈사태가 일어났다.
천둥 소리를 내며 10분간 돌과 함께 쏟아져 내리는데 무서울 정도다.
가끔씩 가파른 능선길을 지나다 보면 산사태로 길이 없어져 얼마 전에 새로 만들어 놓은 듯한 길들도 가게 된다.
"며칠 전 비가 많이 내려서 원래 MBC 가는 길로 가기보다 조금 돌아서 가는 게 낫겠어. 산사태가 날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경험이 많은 람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강을 건너 절벽 아래 길이 아닌 평지 길을 택한 것이다.
길은 점점 가파른 오르막으로 변하고 있다.
해발 3700m의 MBC 까지는 숨을 헐떡이며 올라야 하지만 마차푸차레의 모습이 점점 더 가까이에서 볼 수 있게 된다.
MBC에 다다랐을 때 쯤, 뒤를 돌아 본 나는 숨이 멋을 뻔 했다.
마차푸차레의 웅장함은 모든 것을 압도할 만큼 가슴을 벅차게 하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하다'라는 단어의 느낌을 비로소 알게 된 기분이랄까?
해발 3700m 에서 바로 코 앞에 있는 6900m 짜리 바위산을 바라보는 느낌은 직접 느껴보지 않고서는 언어로 묘사하기 힘들다.
무려 4km나 하늘 높이 솟은 산은 내가 태어나서 단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아찔함이다.
구름 속에 갖혀 있아가 가끔씩 꼭대기를 보여주는 마차푸차레를 직접 보고 나니
왜 네팔 사람들이 그 산을 신성시 여기는지 알 것만 같았다.

시누와를 지나면서부터는 핸드폰의 전파가 잡히질 않아서 전화는 불통 상태다.
하지만 MBC에서는 특별하게도 wi-fi를 사용할 수 있어 SNS로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할 수 있다.
물론 30분에 300루피를 내야 하지만 히말라야 산맥 깊은 곳에서 wi-fi를 이용할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어떤 사람들은 ABC에 오르는 동안 고산증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는 못 올라갔다는 사람도 있던데
MBC에 도착한 나는 여전히 아무런 증상도 없어서 참으로 축복 받은 모양이다 라고 생각했다.
"갈릭 스푸가 고산증을 예방하고 또 효과도 좋으니까, 점심은 꼭 갈릭 스푸로 먹도록 해."
람의 말처럼 갈릭스푸와 팬케익으로 점심을 든든히 먹고, 바로 ABC까지 오르기로 했다.

그런데, 손목시계가 가리키는 해발고도가 점점 올라갈 수록 숨이 가빠왔는데,
드디어 4000m 를 넘어서자 몸의 컨디션은 급격하게 나빠지지 시작했다.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피로해서인지, 아니면 고산증 때문인지 잘 알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산을 오르는 것이 몹시 힘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젊은 일본 여자 한 명과 한국인 남녀 한명 씩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트래킹을 시작하는 날 만났던 젊은 한국 친구들의 일원인데, 고산증이 심해져서 몹시 힘들어 한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은 이미 다 올라간 상태였고, 이들은 고산증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된 것이다. 
하지만 꿋꿋하게 그들은 마지막 목적지를 향해 계속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산을 오를 때......
누가, 얼마나 빨리 오르나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내가 갈 수 있느냐, 가고자 하는 의지가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살면서 저마다 반드시 해야만 할 일이 생긴다.
중간에 포기하는 사람들도 있고, 끝까지 그 일을 이루어 내는 사람도 있다.
산을 오르는 일은 어쩌면 인생 살이와도 똑같은지 모른다.

람에게 먼저 올라가서 방이 있는지 확인을 좀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나는 점점 더 아파오는 머리 때문에 MBC에서 무려 2시간 50분이나 걸려 ABC에 도착했다. 
시간은 이미  저녁 5시가 다 되었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이미 방은 모두 꽉 찬 상태였다.
하지만 람은 이곳 롯지의 주인들과 친한 사이였고, 그래서 어렵게 매트와 이불을 보관하는 방을 얻을 수 있었다.
람은 내게 미안해 했지만, 나는 그것으로도 충분히 고마웠고 하룻밤 묵는데 아무런 불편도 없었다.
침대 하나에 깨끗한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고, 더구나 1인실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불평할 이유는 단 한가지도 없었다.
그보다 문제는 고산증이었다.
따뜻한 거실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는데, 나는 속도 울렁거리기 시작했고 아픈 머리 때문에 자꾸만 눕고 싶었다.
"그러면 안 돼. 우리 바깥에 나가서 조금 걷자. 시원한 바람을 쐬면 좋아질 거야."
람의 말을 따라서 이리저리 20분 정도 바람을 쐬었지만 여전히 컨디션은 좋지 않았다.
저녁을 또다시 갈릭스프로 먹은 후, 7시 반부터 침낭 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하지만 속은 점점 더 울렁거리고 머리도 아주 많이 아파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파도가 몹시 높게 치던 날 울릉도를 향하는 쾌속선에 몸을 맡겼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아주 흡사해. 그냥 배의 출입문을 열고 뛰어 내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지.
하지만, 해는 이미 져버려서 고도가 낮은 MBC로 내려갈 수도 없었다.
그저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누워 있으니 어떻게 잠이 들긴 했다.
잠시 소변이 마려워 눈을 떠보니 12시.
화장실까지 20여미터를 걷는 것이 마치 2킬로미터를 걷는 것처럼 어려웠다.
물을 벌컥거리며 들이켜 마시고 다시 잠을 청했다.
천정이 빙빙 돌며 땅바닥이 머리 위로 올라오는듯 현기증이 일었다.

잠을 자다가 다시 소변이 마려워서 눈을 떴는데, 새벽 3시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거짓말처럼 두통이 사라진 것이다.
몸이 이제 고산지역에 적응을 했나보다.
화장실을 가면서 고개를 들어보니 칠흑처럼 어두운 밤하늘에 수천만개의 별들이 쏟아질 듯 화려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해발 4200m까지 카메라 삼각대를 가져온 것도 바로 이 별들을 찍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힘출리와 마차푸차레 사이로 흐르는 은하수는 마치 만화영화에서나 보는 것 같은 모습으로 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고.
흐르듯 움직이는 은하수의 생생함을 눈으로 흡입할 수 있었던 한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내가 별 사진을 찍었다고 람에게 이야기 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저께는 눈이 와서 별을 볼 수 없었고, 어제 밤에는 구름 때문에 사람들이 별을 볼 수 없어 모두 일찍 잠이 들었지.
그런데 너는 고산증 때문에 일찍 잠들었고, 그 덕분에 새벽에 일어나서 안나푸르나의 별을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이 되었어.
신께서는 너에게만 그날의 별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