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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킹 3일차, 고레파니 - 푼힐 전망대 - 고레파니 - 타다파니 - 추일레
드디어 푼힐 전망대에 오르다
이른 저녁부터 정전이 된 덕분에 침낭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새벽 4시에 맞춰둔 알람에 눈을 떴다. 바깥에는 헤드랜턴을 켜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온다.
Ram과 4:30에 호텔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호텔 거실과 내실 모두 불이 꺼져있고, 정문도 굳게 잠겨있다.
시간이 다 되었는데도 람은 보이질 않는다.
아마도 잠이 깊이 들어서 일어나지 못한 것 같다.
혼자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사람들의 뒤를 따라 올라가면 되는 코스라 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15분 쯤 오르고나니 매표소 건물이 보이고 두 사람이 입장료를 받는다.
25루피다.
다시 카메라와 삼각대를 둘러메고 계단을 오르는데 누군가 뒤에서 헐레벌떡 달려온다.
람이다. 잠시 옷을 챙겨 입으러 다시 방에 들어간 사이에 내가 먼저 출발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카메라 가방 들어줄까?" 묻는다.
"아니..내 가방은 여행 동안 내가 들을 거야. 대신 내 삼각대만 좀 들워줘."
숙소에서 푼힐 전망대까지는 45분 정도가 걸렸다.
하지만 날씨는 흐리고 구름이 많아서 쨍한 일출을 보기는 틀렸다.
하지만 오후 시간의 뿌연 대기와는 다르게 이른 아침의 시정은 무척 좋은 편이어서 히말라야 산맥을 보는데는 문제가 없었다.
어제 만났던 뉴질랜드 노부부를 다시 만났다.
"날씨가 별로죠?" 할아버지가 내게 묻는다.
"아뇨, 비가 안 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래요! 바로 그거에요. 쨍한 날씨를 보지 못했다 하더라도 지금보다 훨씬 좋지 못한 상황이 아닌 걸 생각하면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지요.
여행을 하는 동안 그런 생각을 한다면 충분히 행복할 겁니다"
그의 익살스런 표정과 재치있는 말에 충분히 공감이 간다.
그래..긍정의 힘은 여행을 하는 동안뿐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동안에도 가장 중요한 것이다.
첫번째 목적지였던 푼힐 전망대를 뒤로하고 오늘 부터는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타다파니를 향해 걷기 시작한다.
길의 시작에서 네팔의 국화인 '랄리 구라스'가 정글을 이루는 풍경을 만나게 된다.
한참 동안이나 랄리 구라스 정글 속을 걷게 되는데 아래쪽 지방은 이미 다 잎이 떨어져 버렸지만
고도가 높은 곳에서는 지금이 가장 절정인듯 하다.
푼힐에서도 랄리구라스가 활짝 피어 장관을 이뤘는데 오늘 걷는 길은 온통 랄리구라스 꽃밭이다.
산이 온통 붉게 물들어 사방에서 향긋한 꽃내음이 풍기고 있고, 머리 위로는 웅웅거리는 벌떼들의 소리가 들려온다.
정글을 지나자 능선을 따라 길이 이어지고 사방이 탁 트여서 가슴까지 시원해진다.
풍경은 봄과 겨울을 나누는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왼쪽으로는 만년설의 안나푸르나 산맥들이 장관을 이루고 오른쪽으로는 랄리구라스가 붉은 물감을 뿌려 놓은듯 온 산을 가득 메우는 봄 풍경이 말이다.
트래킹을 시작한 지 오늘이 삼일 째, 오늘은 왠지 피로가 많이 몰려온다.
첫날 포카라행 비행기가 회항해서 카투만두에서 잠을 설치고, 둘째날은 피곤한 몸으로 바로 트래킹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세째날 아침도 새벽같이 일어나서 사진을 찍었고, 오늘도 새벽 4시에 일어나 푼힐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으니 그럴 법도 하다.
하지만 자연 속에서 걷다보면 피로는 쉽게 잊혀진다.
람과 단 둘이 숲길을 걷고 있으니 지금 걷고 있는 이곳이 전혀 다른 세상처럼 느껴진다
데우랄리(ABC 가는 길에 똑같은 이름을 가진 마을이 또 있음)에서 반탄티(울레리에서 고레파니 가는 길에 같은 이름의 마을이 또 있음)까지는
계곡을 따라 계속해서 내려가는 길이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초록의 이끼를 뒤집어 쓰고 물이 흘러가는 풍경은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원시의 풍경들이다. 이런 풍경이 있었다면 아마도 사진 찍는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최고의 이끼계곡이라 불리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풍경이 이곳에서는 너무나 일상적이다.
길은 편안하면서도 낭만적이다.
가끔씩 계곡에 가방을 내려놓고 이리저리 바위를 건너다녀 보기도 한다.
고도는 푼힐 전망대의 3200m에서 내려오기 시작해서 1800m까지 내려왔다.
내려왔다는 건 다시 올라가야 한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오늘 점심은 한국에서 가져온 라면을 먹기로 했다.
힘들고 지칠 때는 매운 음식을 먹어줘야 힘이 난다.
딱 두 개. 람과 내가 같이 먹을 것이다.
식당을 이용하려면 비용을 내야 하는데 보통 200루피 정도를 받는다.
네팔에서 한국 라면은 꽤 비싼 음식이다.
그래서 람도 좋아하는 음식이지만 자주 먹지는 못한다고 한다.
물을 끓이고 라면과 스프를 넣자 냄새가 기가 막히다.
람은 라면도 잘 끓인다. 계란까지 깨서 넣으니 진수성찬이다.
밥도 하나 시켜서 말아 먹으니 그제서야 힘이 솟는 것 같다.
배부르게 점심도 먹고, 커피 한 잔을 시켜 먹으니 천국이 따로 없는 것 같다.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고, 계곡의 바닥까지 내려온 후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숨이 턱까지 차 오르는 가 싶었는데, 이내 언덕의 꼭대기 마을에 도착했다.
타다파니다. 이곳에는 10여 개의 산장들이 밀집해 있는 꽤 큰 마을이다.
그 길목에는 기념품을 파는 좌판들이 있다.
타다파니를 지나면 길은 다시 내리막으로 이어진다.
"오늘 잘 곳은 추일레야. 여기서부터 20분 정도면 되니까 힘을 내라구. 나는 방이 있는지 알아봐야 하니까 먼저 내려갈게. 천천히 조심해서 내려와"
람이 내게 말했다.
가는 길에 브라질에서 온 여인을 만났다. 이름은 쏘냐.
혼자서 트래킹을 하러 왔다고 하는데, 파이낸스에서 근무한다고 한다. 이번에 큰 계약을 한 건 하고, 5개월의 휴가를 얻었다고 한다.
5개월이라...
우리나라에선 그 정도면 휴가가 아니라 휴직이다.
내가 2주의 휴가를 내고 왔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좋은 직장이 어디 있냐고 묻는데 5개월의 휴가라니 정말 부러운 일이다.
추일레는 산 허리에 붙은 작은 마을이다. 롯지에는 다행히 방이 하나 남아 있었는데, 침대가 3개나 되는 3인실이다.
아마도 다른 사람이 오면 같이 쓰게 될 것이다.
잠시 후 서양인 남자가 롯지에 들어섰는데, 람이 나를 보고 쓱 웃는다.
"My room mate!!"
내가 말하자, 람은 바로 맞혔다고 한다.
그는 런던에서 온 올리버라고 자기를 소개했다.
붙임성이 좋고 아주 예의가 바른 청년이다.
저녁식사를 할 시간, 나는 스파게티를 시켰다.
"람, 앞으로는 식사 비용은 모두 내가 낼테니까 먹고싶은 음식 있으면 시켜서 나랑 같이 먹자."
나는 람과 같은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하며 친구처럼 밥을 먹고 싶었다.
눈 앞의 계곡 사이로 설산의 풍경들은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
유난히 힘들었던 세째 날은 그렇게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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