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서라도...
또 며칠이 걸리더라도...
내 명예를 걸고 어떻게 해서든 천왕봉을 다녀 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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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여름..
며칠간의 짧은 휴가를 맞이하여
산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임은 물론 술,담배를 엄청 즐겼고
또 기본 체력도 전혀 돼 있지않은...
그리고 그 얼마전 회사 야간 극기훈련때
전주의 모악산도 끝내 못 올라가서 중도에 기권했던 내가
결연한 의지와 함께 직원들에게 선포했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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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 며칠전에는 비오는 날 지리산에 올랐다가
길을 잃고 얼어 죽은 사람들이 있다는 뉴스도 있었던 터라
산에 갔다가 길이라도 잃는다면 얼어 죽을 수도 있다거나
절반만이라도 올라가면 원하는 만큼 술을 산다는등...
직원들은 아주 노골적으로 비웃으면서
적극적으로 말리는 분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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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뱉어 놓은 말을 주워 담기에는 이미 늦었고
또 휴가 기간동안 무언가 한가지는 꼭 이루고 싶은 마음과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한 이유없는 오기의 싹도 제법 부풀어져 있는터라
말리는 열손 다 뿌리치고 비장의 각오와 함께
태어나서 처음으로 지리산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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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과 새벽달..! (아래 사진 전부는 2009년 2월 산행때 담은 사진임)
중봉에서 본 천왕봉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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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하지만...
출발한지 10분도 되지않아 벌써 후회하는 마음이 급물살처럼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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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큰 고통은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침낭, 담요등 이것저것 꾸겨넣은 배낭의 무게에 어깨가 빠질듯이 아파 죽을 지경이었고
또 그동안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몸에서는
땀이 아닌...수십년 동안 몸 구석구석에 쌓여있는
타락의 찌꺼기들이 땀과 함께 물줄기를 이루어 뿜어대고
좁은 목구멍으로는 들일을 하는 황소의 거친 숨소리를 토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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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봉의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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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올라가자. 끝까지... 아무리 힘들어도...
그리고 죽더라도 천왕봉에 다녀와서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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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실 거리는 발걸음 이었지만 마음으로는
정말 무슨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에 서 있는 것처럼
완전 극도로 비장한 마음으로 오르고 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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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때로는 5분...
가다가 쉬고 이를 악물고 다시 일어서고...
원망스러운 배낭을 수없이 고쳐 메기도 하면서 가고 또 갔지만...
그 긴 고통은 끝이 없는 듯 아득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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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은 비겁한 모습이지만...
컨디션이 좋지못해 그냥 돌아 왔다면서 씩 웃으면....
그러면 이 고통이 없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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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 내기 한 것도 아니고 농담으로 한 얘기인데
그냥 드링크 한 병씩 돌리면 되지 않을까?..."
이런 수많은 유혹의 혓바닥이 내귀를 괴롭도록 간지럽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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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진짜 꼭 이루고 싶었다.
매일 반복되는 별로 보람스럽지도 않은 일상과...
접대라는 변명거리를 앞세우지만
개인적으로 은근히 즐기듯 찾아대는 술,담배..
이런 것들이 꾸물거리는 몸뚱아리의 노폐물을 깨끗이 쏟아내고
내가 아직은 젊음의 혈기가 다만 몇조각이라도 남아있고...
그리고 마음 속으로 내 의지를 알고자 했던 약속과
그 약속을 꼭 지키는 근성어린 오기가 아직은 살아 있다는...
그런 모습들을 꼭 확인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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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2월 같이한 사람들
향적봉님과 손서방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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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는 도중 젊은 연인들을 만났다.
남자는 평소에도 산을 즐기는 듯 세련된 등산복과 거침없는 발걸음 이었지만
여자는 첫 산행인듯 가다가 쉬고 다시 가다가 쉬고
그들 또한 누가 보기에도 고통스런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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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그 연인들과 엇갈려 쉬기를 십여차례..
어디에선가 그 젊은 사내가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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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내 여자 친구도 산을 너무 못타지만
아저씨도 진짜 진짜 못타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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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벌겋게 상기된 얼굴과 땀 범벅인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그토록 마음속으로 노래불렀던 장터목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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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무동에서 오전 9시에 출발했는데 장터목 도착시간이 18시 30분..!
무려 9시간 30분 동안 후회와 번민의 고통을 이기고
기어이 장터목에 도착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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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평생 제일 높은 곳에 마침내 도착한 뿌듯함도 잠시
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데
이미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소진해버린 상태인지라
밥이고 뭐고 다 때려치고 캔 맥주나 몇개 마시고
탠트를 치고 얼른 취침하려 했는데
텐트 칠 곳에서 밥을 하고 있던 젊은 대학생들이
반쯤 탈진 상태인 나를 보고 이것저것 얘기를 듣고는
대단 하다면서 내 밥을 같이 해 준다며 쌀이며 반찬을 달라고 한다.
난 구세주들이라고 생각하며 총알 같은 속도로 그들에게 쌀과 반찬을 주고 나서
나중에 꿀맛같은 밥을 먹고 미안한 마음에
뒤풀이 캔맥주까지 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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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천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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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새벽 마침내 내 발로 우뚝선 천왕봉은
꿈속에서 본 듯한 천국...! 바로 그곳이었다.
발 밑으로 짙게 깔리던 운해도 환상적이었지만
산이라곤 동네 뒷산도 제대로 한 번 오른 적 없던...
또 술,담배로 온통 찌들어진 몸둥이로
몇백번이고 되 돌아 갈까를 망설이면서 그토록 어렵게 올라선 천왕봉이었기에
울컥울컥 가슴 바닥부터 치고 올라오는
뜨거운 눈물을 도저히 누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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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천왕봉을 다녀온 후
행여 누가 천왕봉에 다녀왔다고 하면
무조건 두 단계 정도는 올려다 보는 버릇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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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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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천왕봉에 내가 다시 찾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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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였지만 체력이 이미 늙은이 였던 첫 번째 등산이 아닌
50대 이지만 아직은 젊은 몸과 마음을 잃고 싶지 않은...
그런 열정을 오래도록 가지고 싶은 진사의 모습으로 천왕봉에 다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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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등산시간 9시간 30분이 이제 그 절반만의 시간으로...
젊은 시절..그토록 힘들었던 천왕봉에....
내가 다시 서있다.
그리고 다 죽어가는 모습이 아니고
아직 팔팔한 기운으로 저렇게 천왕봉 구석구석을 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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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하고 힘든 등산과는 아주 다르게
그냥 맨 벌판 오르듯 여유있는 모습으로
휘파람 불며 천왕봉을 오르는 향적봉 산악사진가
하산길에 돌아본 중봉과 천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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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왕봉...!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이면서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를 품에 안고있는 영원한 민족의 웅산..!
작은 가슴이지만 그 굳굳한 기상을 소중하게 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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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여 힘들까 같이 보조를 맞춰 올라준 적봉님과 손서방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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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천왕봉의 오매... 아직은 살아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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