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행운이었다. 사진작가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는 언덕배기에서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 공간을 마련한 것은 행운이었다. 어떤 이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새벽부터 진을 쳤다고 했다. 턱수염을 제법 길게 늘어뜨린 한 사진작가는 수년째 이곳을 찾아왔지만 큰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고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남도에서 매화가 가장 먼저 피는 경남 양산시 원동면 원리마을의 봄은 이렇게 찾아온다.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이맘때면 전국 곳곳에서 몰려든 사진작가들로 길이 비좁다. 찰라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1년을 기다려온 이들은 자리를 비운 사이 기차라도 지나갈까봐 화장실도 잘 안 간다.
낙동강 위로 은빛 햇살이 수놓은 오후 3시쯤. 저격수로 돌변한 사진작가들이 로또복권 1등 당첨만큼 어렵다는 KTX 교행 장면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에 눈을 떼지 못했다. 순간 매화가 흐드러지게 핀 언덕 아래의 경부선 철길로 무궁화호 열차가 스쳐갔다. 부산행 KTX와 서울행 KTX도 흐르는 강물처럼 지나갔다. 그러나 오후 3시 30분쯤 볼 수 있다던 매화단지에서의 KTX 교행 장면은 끝내 연출되지 않았다.
초스피드로 달리는 KTX는 1초만 어긋나도 교행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순간만을 찍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기다리던 사진작가들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메고 발길을 돌리는 이들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 보였다. 이들은 내일 또다시 이곳을 찾는다.
시인의 고향은 풍경도 시적이다. 낙동강 강변을 S자로 달리는 경부선 철길이 매화단지를 관통한다. 매화나무 가지에서 화조도를 연출하던 콩새 무리가 기적이 울릴 때마다 음표처럼 날아오른다. 최백호가 노래한 ‘영일만 친구’의 실제 모델인 홍수진 시인의 고향인 원리마을은 매화가 만발한 낙동강을 배경으로 KTX가 S자 곡선을 그리며 교행하는 사진으로 유명해졌다. 부산과 서울을 출발한 장대형 KTX가 원리 매화단지에서 만나는 것은 하루 한 차례. 이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3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토고산 자락 언덕배기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사진작가들이 진을 친다.
하지만 이것도 올해로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 올 10월 울산 쪽으로 노선이 바뀐 고속철도 대구∼부산 구간이 개통되면 이곳에서의 KTX 교행 장면은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양산 물금역에서 원동역을 거쳐 밀양 삼랑진역에 이르는 약 18㎞ 길이의 낙동강변 철로는 조선시대에 부산과 한양을 최단거리로 연결하던 영남대로 잔도(험한 벼랑에 낸 길)가 지나던 곳. 일제강점기 때 철도가 부설되면서 잔도는 사라졌지만 강변을 따라 깎아지른 벼랑을 달리는 철길은 그대로 남아 그림 같은 풍경을 그린다.
‘둘 중 어느 길이 더 아름다운 가를 말한다는 것은 심히 어렵고 곤란한 일이지만 나는 삼랑진에서 물금에 이르는 경부선 철길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다. 밀양부터 불어나기 시작한 낙동강이 합천 황강 쪽에서 흘러오는 또다른 줄기와 어우러지는 삼랑진부터 자못 위용을 갖추니 여기부터 물금까지 도도히 흘러내리는 모습은 차라리 장중한 교향악 같다고나 할 일이다.’
유홍준씨는 일찍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우리나라 도로망은 남북으로 발달했으나 강은 대개 동에서 서로 흘러가니 오직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낙동강과 섬진강만이 강을 따라가는 아름다운 길을 만들게 했다’며 물금∼원동∼삼랑진 철길과 하동∼구례∼곡성 찻길을 극찬했다.
가수 최백호의 절친한 벗인 홍수진 시인은 철길이 아름다운 원리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에 고향을 떠나 영일만에서 오두막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최백호의 ‘내 마음 갈 곳을 잃어’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1977년 어느 날에 둘은 영일만에서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밤새 소주잔을 나누다 ‘영일만 친구’ 가사를 만들었다.
‘우리는 그때 부산역에서 같이 떠나, 완행열차가 서는 곳, 경부선 원동역에서 헤어졌다. 1969년 / … / 그대 떠난 후 남아있는 것, 시 한 줄의 아픔 뿐, 너무 늦은 눈물로 내 다시 찾아오마’
시인은 20세 되던 1969년에 부산발 완행열차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는 원동역에서 ‘이별’을 했다. 그리고 그 아픔을 시 한 줄에 담아 ‘경부선 원동역’을 탄생시킨 후 49세에 암으로 운명을 달리한다. 시비 ‘경부선 원동역’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1년이 지난 2008년에 친구들에 의해 경부선 철길과 낙동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원리 언덕배기에 세워졌다.
낙동강과 철길을 벗한 원동의 매화단지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곳은 홍수진 시비 아래에 위치한 순매원. 양산의 청매실농원을 꿈꾸는 김용구(62)씨 부부가 10여 년 전 매화와 잡목이 울창한 철길 옆 언덕 1만여 평을 매화단지로 조성했다. 장독대 옆의 매화 50여 그루는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매실을 상품화하기 위해 한반도 처음으로 심었던 고매화.
기찻길 옆 오막살이를 방불케 하는 순매원에는 음력 설날을 전후해 꽃이 피는 설중매화 한 그루가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설중매화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일찍 피는 매화나무로 철길 옆에 바짝 붙어 철 이른 봄소식을 기차에 실어 북으로 보낸다. 순매원이 가장 아름다운 때는 만개한 매화가 지기 시작하는 3월 말. 기차가 지축을 울리며 지날 때마다 매화 꽃잎이 함박눈처럼 흩날린다. 매화나무 아래는 쑥과 냉이 등 나물을 캐는 아낙들의 차지. 지난주에는 남부지방에 폭설이 내리면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설중매의 장관도 연출했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철길과 매화가 활짝 핀 순매원의 풍경은 원동역과 순매원 중간에 위치한 1022번 도로의 전망대에서 볼 때 가장 아름답다.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낙동강의 푸른 물빛과 매화단지 사이로 알록달록한 색깔의 컨테이너를 실은 화물열차가 달리는 모습은 한 폭의 풍경화.
경부선 역사 중 전기가 마지막으로 들어왔다는 아담한 원동역은 숨바꼭질 하듯 1022번 지방도 아래에 위치해 그냥 지나치기 쉽다. KTX와 화물열차 등 역사를 통과하는 하루 250여 편의 열차 중 원동역에 정차하는 열차는 무궁화호 19편 뿐.
타고내리는 승객보다 통과하는 기차가 더 많은 원동역은 입구 옹벽에 그린 거대한 장미 벽화가 눈길을 끈다. 원동역 앞 낙동강변은 역무원들의 관사가 있던 마을로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관사와 민가를 철거한 자리에 매화나무를 심어 지금은 매화단지로 변신했다.
매화의 자태와 향기가 눈과 코를 멀게 하는 경부선 원동역 구간. 느림의 미학이 지배하는 이 곳에서는 전광석화처럼 스쳐가는 KTX보다 흐르는 강물처럼 느릿느릿 달리는 무궁화호 열차가 훨씬 시적이다.
양산=글·사진 박강섭 관광전문기자 k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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